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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건(1822-1846) 조선말기의 신부(神父)

    • 제작연도 연도미상
    • 표준영정 지정연도 1986년
    • 영정크기 120 x 80cm
    • 제작작가 문학진 (1924-2019)
    • 제작방법 ·
    • 소장지 및 소장인 당진 솔뫼성지
    인물소개
    자는 여해(汝譜), 본관은 덕수(德水), 서울 출신. 1579년(선조 9)식년무과(式年武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미관말직(微官末職)만을 지내다가 1591년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에 승진, 좌수영(左水營 : 麗水)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전력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초로 옥포(玉浦)에서 적수군 선견부대 30여척을 격파, 이어 사천(泗川)에서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13척을 분쇄하고, 당항포(唐項浦)에서 1백 여척을 격파했으며, 한산도(閑山島)에서 적선 70척을 무찔렀다(閑山島大捷). 다시 가토(加藤嘉明)의 수군을 안골포(安骨浦)에서 격파하고, 적군의 근거지 부산에 쳐들어가 1백여 척을 부수는 등 적 수군을 궤멸(潰滅),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本營)으로 삼고, 최초의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來援)하자 죽도(竹島)에 진을 옮기고, 이어 장문포(長門浦)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적 수군의 전진을 막아 왜군의 작전에 큰 차질을 초래케 하였다. 1597년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서울에 암송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정탁(鄭琢)의 변호로 권율(權慄)의 막하에 백의종군(白衣從軍)하였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원균이 참패하자 삼도 수군통제사에 재임,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嗚梁)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부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다음해 적선 5백척이 노량(露梁)에 집결하자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의 수군과 연합, 적군을 기습 대파하고 혼전(混戰)중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충성심이 강하고 전략에 뛰어난 용장(勇將)으로서 임진왜란 중 싸움마다 승리했으며, 적 수군의 기세를 꺾어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했고, 곡창 지대인 전라도를 방어함으로써 군량미를 확보하는 등, 위기에 처한 국가를 지탱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613년(광해군 5)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아산의 현충사(顯忠祠)등에 배향(配享), 시호는 충무(忠武). [著書] 難中日記, 時調 等 [文獻] 宣祖實錄, 千寬宇 : 李舜臣論 等 (출처 : 전통문화포털)교명 안드레 (Andre), 1836년 (헌종 2) 프랑스 신부 모방(P. Maubant)에게서 영세(領洗)를 받고 예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상경(上京)하였다. 역관(譯官) 유진길(劉進吉)에게 중국어를 배우고, 모방 신부의 소개장을 가지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조선전교(朝鮮傳敎)의 책임을 진 마카오의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칼레리 신부로부터 신학(神學)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새로운 서양 학문과 프랑스어, 중국어, 라틴어를 배웠다. 1842년 수업을 끝낸 다음 기해박해(己亥迫害) 이후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고 있는 고국에 밀입국을 시도하였다. 처음 의주(義州)를 거쳐 서울로 향하다가 감시가 심하여 되돌아갔고, 얼마 후 페러올 주교로부터 고국에 잠입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번에는 두만강변 경원(慶源)을 거쳐 입국하려다가 또 실패하고 빠자즈([八子家]로 돌아가 메스트르 신부 문하에서 신학을 연구하였다. 1845년(헌종 11) 단신으로 국경을 넘어 서울에 잠입하는 데 성공하여 천주교 대탄압 이후 위축된 교세 확장에 전력을 기울이다가 다시 프랑스 외방전교회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하여 쪽배를 타고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금가항(金家港) 신학교에서 탁덕(鐸德)으로 승품(陞品),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신부가 되어 만당성당(滿堂聖堂)에서 처음으로 미사를 집전(執典)하였다. 8월 페레올 주교, 다블뤼 주교와 함께 상하이[上海]를 떠나 충남 강경(江景)에 잠입하여, 서울을 향하여 각지를 순방하면서 비밀리에 신도들을 격려하고 전도(傳道)에 힘썼다. 1846년 선교사의 입국과 선교부와의 연락을 위한 비밀 항로 개설을 위하여 백령도 부근을 답사하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전추 6회에 걸친 혹독한 고문 끝에 선교부와 신부들에게 보내는 편지 및 교우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쓴 후 25세로 순교, 미산리(美山里)에 안장되었다.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복자위(福者位)에 올랐다. (출처 : 전통문화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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