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형왕 행몰연대 미상 금관가야의 제 10대 왕
- 제작연도 연도미상
- 국보지정연도 1997년
- 영정크기 153 x 98cm
- 제작작가 율당 김종섭 (1950~)
- 제작방법 ·
- 소장지 및 소장인 덕양전
- 인물소개
- 구충왕(仇衝王) 또는 구해왕(仇亥王) 이라고도 표기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9년(532) 조에 보면 “금관국의 임금 김구해(金仇亥)가 왕비 및 세아들인 장남 노종(奴宗), 중남 무덕(武德), 계남 무력(武力)과 함께 국고(國庫)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였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금관가야의 멸망연대를 진흥왕 23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도 가야가 반함에 왕이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가야를 정벌하였으며 이때 사다함(斯多含)의 전공이 가장 컸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로 세 아들의 이름은 세종(世宗), 무도(茂刀), 무득(茂得)이라 하였는데 「삼국사기」의 이름과 표기가 다르다. 삼국사기에는 금관가야가 멸망하자 신라는 이들을 예로 대접하고 왕에게는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고 그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하였다고 하였다. 아들 무력은 많은 무공을 세우고 각간(角干)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김유신은 무력의 손자이며 금관가야는 멸망하였으나 그 왕족은 진골귀족으로 신라에 편입되어 신김씨(新金氏)라 칭성하면서 신라의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文獻] 三國史記, 三國遣事 (출처 : 전통문화포털)
- 관련 단체 및 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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